[차홍규 칼럼] 4. 한국과 중국의 첫 번째 공식회담

[차홍규 칼럼]?지난번 칭화대 소개에 이어 중국관련 2번째 글입니다. 1983년에 일어난?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과 관련한 비화를 소개한다. 당시 언론매체를 통해 당 사건을 접한 분들은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필자는 당시 사건을 한국과 중국의 첫 번째 공식회담으로 정리한다. 당시 기억을 더듬어 가며 필자가 소개하는 후일담, 비화와 함께 한중관계의 격세지감을 공감해 보면 어떨까 싶다.

 

1983년 5월 5일 어린이날인 대낮에 수도 서울에 갑자기 요란한 사이렌이 울리고

“실제상황입니다. 주민들은 비행기 폭격으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십시오”

라는 방송이 이어졌다. 당시 서울 시민이었던 필자는 영문을 몰라 당황하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사건은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으로 승객 96명(납치범 6명 제외), 승무원 9명을 태운 중국민항(中?民用航空?局)소속 여객기 한 대가 선양 동탑공항(瀋陽,東塔空港)을 떠나 상하이 훙치아오국제공항(上海,虹???机?)으로 가던 중에 발발한 사고였다. 탁장인(卓章仁) 등 6명의 납치범들은 기내를 무력으로 장악하고 기수를 대한민국으로 돌릴 것을 요구하였으나 승무원이 거부하자, 승무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2명의 승무원에 중상을 입히고 기수를 우리에게로 돌렸다. 중화인민공화국 본토를 출발한 비행기가 대한민국에 착륙하기는 건국 후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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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는 서울을 피하여 춘천에 소재한 ‘캠프 페이지'(CAMP PAGE) 주한 미합중국 육군 항공 기지에 불시착하였다. 그들은 중화민국 대사 면담과 중화민국(台?)으로의 정치적 망명 허용을 요청하여, 그 당시 안기부 박세직 해외 담당 제2차장이 대책반장을 맡아 납치범들을 기내에서 직접 면담하고 요구 조건을 수용할 의사를 밝히고 난 다음에야, 납치범들은 무장을 해제하였다. 실무 담당자 중 한명은 당시 법무부 출입국 박희태 관리국장(후에 국회의장)이었다. 당시 중국과는 미수교 상태였기 때문에 이 사건은 외교적, 정치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일부 신문에서는 ‘봉황이 날아 들어왔다’고 노골적으로 이야기 하는 등 우리 정부는 이 사건을 최대한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였다.

 

이 사건의 해결을 위해 중국 정부는 북한을 의식하여 간접교섭방법을 통해 항공기와 승무원의 송환을 협상하려 소극적이고 제한적인 접촉을 원했으나, 협상의 주도권을 거머쥔 우리 정부의 고자세에 직접적인 교섭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건 발생 3일 만에 중국민항총국장 심도(沈圖) 및 33명의 관리와 승무원이 직접 우리의 서울을 방문하여 당시 공로명 외무부차관보(후에 외교통산부 장관 역임)를 대표로 하는 우리 측과 직접 협상을 벌여야 했다.

 

후일담이지만,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이 사건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교섭의 핵심은 납치범의 처리와 서명당사국의 명칭이었다. 당연히 중국 측은 납치범들은 범죄인들로 간주하고 인도를 요구 하였고, 양국의 국가 명칭도 사용치 않으려 하였으나, 결국 9개 항에 걸친 정식 외교 각서에 서명을 하고, 명칭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정식국호를 사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항공기는 안전점검 후, 승무원, 탐승객은 부상자 치료 후에 중국으로 돌려보내기로 하였으나 납치범은 우리 뜻대로 대한민국 헌법에 의해 재판할 것과 향후 유사한 사건이 발생될 때 긴밀히 협조한다는 선에서 합의가 이루어졌고, 다음해부터 친인척의 방문 교류를 허용하기로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승객과 승무원들을 당시 최고급인 워커힐 호텔에 투숙시킨 뒤, 여의도와 자연농원(현, 에버랜드) 관광을 시켜주었고, 출국 시에 삼성 컬러 TV를 선물하는 등 한-중 관계개선의 지렛대 역할로 이 사건을 활용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납치범 6명은 1년간의 형식적인 구속 수감 후, 추방형식으로 중화민국(台?)으로의 정치적 망명을 허용하였으나, 납치범 중 일부는 망명이후 중화민국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몸값을 목적으로 아동을 유괴했다가 살해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는 불상사도 있었다.

 

그 이후 우리가 중국과 수교하려고 무척이나 애를 쓴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미 중국정부는 한-중 수교를 예견하고 친인척 방문을 기회로 중국의 안전부(우리의 국가정보원) 소속은 물론 조선족 공무원들을 부부동반으로 동원하여 한국의 각지에 보냈다. 이들은 특정임무를 받고 임의로 한국의 식당이나 공장 등에 취직하였고, 한국에서 버는 돈으로 생활도 하고 저축도 하고 정보도 얻었으며, 귀국 후에는 정보의 가치에 따라 밀렸던 봉급은 물론 보다 나은 신분적 대우와 포상금을 따로 받았다. (위 사항은 우리 신문지상에 보도되지 않은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확인한 것이다.)

 

우리나라가 1992년 8월 24일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하여 수교한지가 올해로 22년째이다. 처음 중국과 수교할 때만 하여도 중국이 이렇게까지 발전 할 줄은 당시 중국 현지에 있던 필자는 물론, 중국인들도 상상조차 못하였다. 처음 중국에 갔을 때는 백화점이란 곳도 화장실에 대변보는 곳의 칸막이가 없었다. 여러 사람들이 쪼그리고 앉아 볼일을 보고 있는 광경을 보는 순간의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러한 중국이 이제는 미국과 더불어 G2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더욱 무역규모가 미국을 앞질러 우리나라의 세계최대 교역국이라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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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경 칭화대학교 미술대학 정년퇴임
  • 광저우 화난리공대 고문교수
  • 화성폴리텍대학 명예교수
  • 북경 SUN ART 갤러리 전속작가
  • 북경 조어대, 중국항공, 하이얼 등 작품소장
  • 국제 비엔날레, 아트페어 등 단체전 200여회 개인전 26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