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트 디즈니의 60대

월트디즈니는 1901년 12월5일에 태어나 1966년 12월15일까지 꼬박 65년간 살다 생을 마감한 미국 영화계의 별이다. 우리나이로 치면 66세, 미국 만나이로 치면 65세가 되겠다.

꿈을 현실로 만든 몽상가라는 평을 받으며, 누구보다도 열악한 환경에서?계속적인?실패에도 굴하지않고 만화와 애니메이션에대한 의지를 불태워 세계가 알아주는 명사가 된,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114의 나이)도 우리 마음속에 희망과 꿈의 아이콘이 되어주는 월트 디즈니의 60대는 어떠하였을까.

29세의 젊은 나이로 영화계에서 인정받는 성공인사가 된 그는 작은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을 지속하였다. 그가 죽기 직전까지도 말이다. 그만하면 됐고…가족을 돌보며 남은 생을 편안히 살아도 충분할 터인데(보통사람의 생각으로서는), 1960년대 8000만달러(약 870억원)의 천문학적인 자산을 보유하기도 했던 그는 도전과 성장을 멈추지 않았기에 부호라기 보다 몽상가로 불리우는 것이 수긍이 갈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성인들도 영원히 꿈의 세계를 맛볼 수 있는 디즈니 랜드를 오픈하였고, 더 대단한 것은 그의 사후에도 디즈니의 명성이 지켜져 오고 있다는 것이다.

디즈니의 생애 동안(1901~1966) 그의 과업을 수치로 따져보면 다음과 같다.

  • 그의 생애 2억 4천만명이 디즈니 영화를 보았고
  • 1 억명의 시청자가 디즈니 TV프로그램을 시청했고
  • 8000만명이 디즈니의 책을 읽었고
  • 5000만명이 디즈니의 음반을 들었으며
  • 8000만명이 디즈니 캐릭터 상품을 샀고
  • 1억 5000만명이 디즈니 연재만화를 읽었고
  • 8000만명이 디즈니 교육 영화를 보았으며
  • 700만명이 디즈니랜드를 다녀갔다고
  • 700개 이상의 표창장과 명예 학위를 받았고
  • 29번의 오스카상을 수상했고
  • 4번의 영애로운 상(에미상, 어빙 샐버그상, 대통령이 주는 자유 메달, 프랑스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이정도면 수퍼 인플루언서 (대단한 영향력을 끼친사람) 다. 1960년대 세계인구가 30억명인것을 감안하면 디즈니 영화만으로도 세계 8%의 인구에게 그의 작품이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수치를 보니 누가 과연 월트 디즈니 앞에서 자신의 경력과 성과를 자랑할 수 있을까 싶은것이 절로 겸손해지게 만든다.

그러면, 디즈니가 자신의 인생 후반부에서 한 일은 무엇일까.?디즈니의 연표를 통해 보면, 다음과 같다.

  • 1961년 <101마리 달마시안> 개봉
  • 1962년칼 예술대학(California Institute of Arts)개교
  • 1963년애니메이션 <아서 왕의 검> 개봉
  • 1964년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결합한 <메리포핀스> 개봉
  • 1965년?실사영화<캘러웨이가의 사람들>개봉, 월트 디즈니 월드 설립 계획 발표

매년 굵직한 일들을 해내었다. 인생의 최 후반부에서?어떠한 마음으로 어떻게 보냈던 것인가 좀더 자료를 찾아 정리해보니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 수 있었다.

디즈니는 제작자로서 출발한 사업가이지만, 제작자로서 그의 자아인식이 컸던 모양이다. 그의 성공을 일궈낸 여러 작품들은 제작자로서 완벽주의자적인?월트디즈니가 없었다면 결코 이뤄내기 힘든 혁신이었다. 사업가로서도 존경받는 월트 디즈니이지만, 1958년 그가 제작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마스에 개봉된 영화가 성공을 거두었을때, 사업가로서 기뻐하기 보다는 제작자로서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고 한다.

‘이젠 내가 없어도 작업이 잘 이뤄지니 슬슬 마지막 작업을 준비할 수 밖에 없다’ 고 생각한듯 하다.

이러한 심정을 우리 시니어들은 본인의 직장이나 직업을 통해서 느꼈을 때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 때 그릇이 큰 한 사람으로 남기위해 자신을 다독거리며 흐뭇한 웃음을 지어보이거나 실제로 그러한 분들도 계시지만, 직업인으로서의 의식이 강한 사람일수록 감정적으로는 못내 서운할 수 있을 것이다. 디즈니또한 그러했던 것 같다.

그러한 마음으로 제작한 애니메이션이 <잠자는 숲속의 공주>인데, 이는 실패해 버리고 만다. 어디에도 그의 심정까지는 나오지 않았지만, 자신의 제작자로서의 존재감에 대해 회의가 들었을 무렵, 작품의 실패를 맛보게 되면 그 심정은 오죽 참담했을까 싶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죽기전 제작자의 명예를 회복하게 된다.?그의 마지막 작인 <메리포핀스>를 통해 평론가로부터 호평을 받고, 성공을 거두었다. 60대로 접어들면서 스튜디오에 있을 일도 별로 없어진 그는 메리포핀스를 제작하면서 젊은날의 월트 디즈니가 되어 그의 모든것을 걸고 청년처럼 밤을 새우며 집에도 들어가지 않은채 제작에 모든 에너지를 불태웠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60대에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기 때문일까, 1961년 12월 그가 60세가 되던 해에는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이 심해, 우울증 증세까지 보였다고 한다. 디즈니 슬하에 2명의 딸이 있었는데, 그의 큰사위인 론 밀러를 TV 시리즈물인 <월트 디즈니의 놀라운 컬러세계>라는 작품의 감독 자리에 앉혔다. 론 밀러가 미식축구 선수 출신이었던 것을 보면, 이는 매우 쌩뚱맞은 포지션이다. 그는 직원들에게 결코 인정을 받지 못해 그 자리가 자신의 형 로이의 아들에게까지 넘겨질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자기 가족애가 컸던 것을 보면, 그도 못지않게 동양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나보다. 어쩌면 인간 보편적인 성향인지도 모르겠다.

어째든, 그는 가족들에게 자신의 자산을 물려주는 일(재산 분할과 상속)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디즈니랜드는 1948년 봄, 디즈니의 머리속에서 구상되어, 그해 여름 알래스카로의 여행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디즈니랜드의 주주는 회사일에 관여하기 싫어했던 아내를 빼고, 디즈니의 두딸과 동서인 빌 코트렐이 전부였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그가 죽은 후 그의 재산 절반은 가족에게 나머지는 그의 유언에 따라 디즈니 재단등에 기부되어 사회를 위한 일에 쓰여졌다고 한다.

한편 <메리포핀스>가 성공을 거둔후, 영화제작의 지식을 후배들에게 전수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된다. 디즈니는 예전에 있었던 쉬나드 대학과 새로 만들 칼 예술대학을 합병해, 만화가를 양성하는 최고의 대학을 만들 결심을 하고, <메리포핀스>수익금의 일체를 새로운 학교 건물을 짓는데에 투자했다. 그는 엄청난 크기의 땅을 기부하여 1965년 12월 쉬나드 학교와 칼 예술 대학을 합병했다(칼 예술대학의 새로운 탄생).

월트 디즈니는 1966년 12월 그는 병상에서 디즈니 스튜디오를 마지막으로 보며 눈을 감았다.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그의 꿈과 신념을 현실화 하는 일에 미쳐있었고, 무서운 집중력과 감히 아무도 저지할 수 없는 강력한 추진력으로 하고 싶은 일을 모조리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아마 그가 더 살아있었더라도 생각해 낸 것들을 실천하기 위해 정열을 불태우는 삶을 지속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의 생애를 통해 그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메시지는 강력하고 단순하다.

“꿈대로 살아라”라는 것이다.

자기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발견하는 것이 먼저일 테고, 그것을 발견했다면 어떤 어려움과 위험도 감수하고 이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불태우며 사는 삶이 자기자신에게 형언할 수 없는 만족감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얼마나 타인까지도 풍요롭게 하는지 월트 디즈니는 자신의 삶을 통해 증명해 보였다.(물론 그의 인생에도 어둠이 있다. 그가 영화계의 사람들 몇몇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는 바람에 그들의 삶이 망가졌던 것이나, 자신이 부리던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부족했던 면모가 군데 군데 보인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다운” “GOAL”을 발견한 액티브 시니어분들의 꿈과 도전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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